윤석열 탄핵 심판과 영화 <콘클라베>(2025)

*주의: 영화 <콘클라베>(2025)에 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난 4월 4일, 한국에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이 있었다. 다른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며칠 전부터 그 순간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헌법재판소는 탄핵 심판을 오전 11시로 예정했다. 그 전날 밤 나는 생각했다. 내일 심판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오후에는 도저히 원고 집필에 집중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탄핵 결과를 확인한 뒤, 곧바로 영화를 보기로 결심했다. 그때 예매한 영화가 바로, <콘클라베>였다. 

사실 이 영화는 두 번째 관람이었다. 첫 번째 관람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봤기 때문에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이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가기 전에 반드시 한 번 더 보고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평소 영화를 자주 보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두 번이나 극장에서 집중해 감상하고 싶은 영화는 매우 드물다. 이처럼 조금은 염세적인 나를 다시 영화관으로 이끈 <콘클라베>의 매력 포인트를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어부의 반지

영화는 선대 교황의 임종 장면으로 시작한다. 교황의 침대를 둘러싸고 추기경 로렌스, 트랑블레, 벨리니가 임종 기도를 올린다. 추기경 트랑블레는 선대 교황의 손에서 ‘어부의 반지’를 빼어, 침대 옆 책상에 놓인 공구를 이용해 반지를 분리한다. 어부의 반지는 밴드와 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트랑블레는 그 둘을 나눈 것이다. 이는 이제 교황의 자리가 비어 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나는 이 장면의 의미를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왜 저 반지를 분리하는 장면을 영화 초반에 배치했을까?’ 하고 의아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기 위해 메모를 정리하던 중, 문득 머릿속에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부의 반지는 교황의 상징이다. 매번 선출된 교황의 손 크기에 따라 밴드의 크기도 달랐을 것이다. 그러니 교황이 임종을 맞이한 그 순간, 이 반지는 자연히 새로운 주인을 찾아야 하는 운명을 지닌다. 그래서 그 장면을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눈물을 흘리는 로렌스가 장면의 주인공인 줄 알았지만, 두번째 관람에서는 그 장면의 중심이 사실은 ‘어부의 반지’에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 믿음이 폐쇄적 구조 안에 갖혀 있지는 않은가?

‘콘클라베(Conclave)’는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비밀회의다. 바티칸에서 열리며, 전 세계 추기경들이 모여 3분의 2 이상 찬성을 00로 투표가 진행된다고 한다. 나는 카톨릭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서, 이 회의 역시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콘클라베는 라틴어 con clave에서 왔는데, 뜻은 ‘열쇠로 잠긴 방 안에서’이다. 어원 그대로, 콘클라베는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환경에서 진행된다. 영화는 이 점을 아주 잘 보여준다. 모든 창문과 문에 셔터가 내려오고, 외부 출입은 금지된다. 추기경들은 함께 숙식을 하며, 오로지 다음 교황을 선출하는 데만 집중한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정치 싸움은 종교라는 특수성과 맞물려, 독특한 정치스릴러로 발전한다. 여러 추기경이 의심받거나, 견제를 받거나, 정치적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교황이 될 가능성이 낮아진 인물들은 격분하고 방황하지만,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이들은 결국 자신보다 나은 인격, 더 적합한 교황 후보를 알아보고 그에게 표를 던진다. 나는 이 점이 감동적이었다.  

영화 초반, 추기경 로렌스는 콘클라베의 관리자로서 수리 중인 스테인드글래스를 보며, 회의 시작 전에 공사가 끝날 수 있을지를 걱정한다. 그 창문은 보안유지를 위해 보수되고 있었지만, 결정적 순간에 폭탄테러로 산산조각 난다. 그 직후에 진행되는 투표에서는 부서진 창문 밖에서 새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그 소리가 수녀원 안의 새장 속의 새소리와 대비된다고 느꼈다. 

‘폐쇄된 공간 속에 갇힌 새 vs 열린 공간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성당이라는 구조물, 콘클라베라는 제도, 교리라는 시스템 안에 갇힌 신앙. 그 신앙은 어쩌면 바깥의 미세한 소리에 귀 기울일 때에만 비로소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 신의 음성은 견고한 규율 속이 아니라, 열린 구조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닐까.

3. 로렌스의 연설

두번째 관람에서는 손수건을 꼭 챙겨갔다. 추기경 로렌스의 연설을 들으면 눈물을 흘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제가 가장 두려워하게 된 죄는 확신입니다. 확신은 통일의 가장 큰 적이며, 관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조차도 마지막 순간에는 확신하지 못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의심과 함께 걸어가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만약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신앙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심하는 교황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말이 나를 울린 이유는, 아마도 내가 확신을 가지려 애쓰는 사람들에 대해 오래도록 경멸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복잡하지 않은, 명쾌한 해답을 갈망하고 또 갈망하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은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니 로렌스의 연설은 내게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확신’의 반댓말로 ‘의심’을 제시한다. 보통 의심은 부정적인 개념이지만, 이 경우엔 오히려 우리가 지향해야 할 태도가 된다. 확신은 사고를 획일화시키고, 의심은 사고의 다양성을 낳는다.

4. 색감과 구도

잘은 모르지만, 요즘 영화에는 유행하는 색감과 구도가 있는 것 같다. 절제된 구도와 쨍한 포인트 색감이 유행인 듯하다. 멋있긴 하지만, 이런 미장센이 영화의 메시지와 어긋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는 과하게 미감에 집중하는 영화들, 특히 모든 것이 통제된 것 듯한 장면들에 대해 약간의 거리감을 느낀다. 그런 통제는 때로 파시즘처럼, 강박적 질서에 매몰된 정신 상태와 어울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아닐수도 있다 ㅎㅎ)

반면 <콘클라베>의 색감과 구도는 여러면에서 곱씹어볼 만한 장면이 많았다. 추기경들의 붉은색 의상과 성당의 대리석 톤이 대비되며 만들어내는 장면들이 특히 인상 깊었다.

로렌스를 중심으로 마음이 맞는 추기경들이 강당 객석에 앉아 은은한 조명을 속에서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아름다웠다. 

계단 장면도 좋았다. 벨리니와 로렌스, 그리고 또 한 명(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이 담배를 피우며 전략을 짜는 장면. 수평적 배치와 아래층 발소리로 인한 수직적 전환이 계단실이라는 공간적 특징과 은밀한 대화의 내용이 맞물려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다.

5. 너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트랑블레의 비밀문서가 드러나며, 그는 더 이상 유력 후보가 아니게 된다. 로렌스는 보수 성향의 이탈리안 추기경 데데스코의 유일한 적수가 된다. n번째 투표에서 로렌스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적는다. 그리고 그 용지를 투표함에 넣으려는 순간, 성당 상부의 유리창이 폭탄테러의 충격으로 산산조각 나며 회의장으로 파편이 쏟아진다. 투표장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추기경들의 붉은 옷 위에는 먼지가 내려앉았다. 이마에 피를 흘리는 추기경도 보인다. 나는 이 장면이 신이 로렌스에게 신호 같았다. 

“너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로렌스는 후에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 소식을 듣고, 그 여운을 안은 채, 이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들어간 것은 이번 주 가장 잘한 일이었다. 

여담이지만, 상영관에서 혼자 빈 스크린을 바라보며 앉아 있을 때, 뒤에서 아주머니 네다섯 분이 들어오셨다. 그분 한 분이 “아니, 어떻게 전원 만장일치야? 이 나라가 어쩌려고 이래?“ 하고 크게 한탄하셨다. 나는 비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그분은 이 영화가 무슨 영화인 줄 알고 들어오신 걸까? 분명 또 실망하셨을 것이다. 

영화가 끝난 뒤, 그 무리는 영화에 대한 말은 일언반구도 없이, 오로지 “엘리베이터 어디 있어요?”라며 복도를 따라 멀어져갔다.

우리 사회는 참 다양한 목소리가 있고, 나 역시 그중 하나임을 새삼 느낀 한 주였다. 추기경 로렌스의 말처럼, 나도 확신이 아닌 의심이 살아 숨 쉬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번에 선고문을 읽은 문형배 헌법재판관 덕분에 블로그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나는 유학 시절엔 가끔 개인적인 글을 올리곤 했지만, 한국에 돌아온 후로는 아예 에세이는 쓰지 않았다. 그런데 문형배 재판관님이 블로그를 열심히 쓰셨다는 일화를 보고 자극을 받았다. 이번을 계기로 나도 매주 보고 들은 것 중에 좋았던 것을, 이 공간에 가볍게 정리해보려 한다. 

주절주절, 가볍게. 

여기까지 읽어주셨다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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